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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아웃사이더 1부 -<중동편>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6-15 16:07 조회3,825회 댓글0건

    본문





    ※ 자전소설입니다.

    <중동편>


    1.

    바둑에서 단수가 되는 곳을 호구라 하는데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위험한 곳이라는 뜻이다.

    '비열한 사람...'
    영후는 지난 이 십년 전의 일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그가 비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쩐지 열 여덟시간을 비행하고 다시 두시간을 달려 도착한 현장에서 한소장은
    "왔냐?"하고 건성으로 한마디했을 뿐 별 반가운 내색없이 식당으로 휭하니 가버렸었다.

    그리고 숙소를 배정받고 자고 난 다음날 오전 8시에 그는 찝차에 영후를 태우고는 30분정도 모래길을 달려가다가
    시멘트가 산처럼 쌓인 곳에 차를 멈추고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페이로다와 인부들 두사람이 오면 저기 보이는 시멘트를 가능하면 여기서부터 감독관들 눈에 안 보이는 먼 곳으로 옮겨라"고 영후에게 지시하곤 사무실로 돌아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 담만까지의 고속도로공사 구간중의 가장 환경이 열악한, 원주민들이 지옥의 계곡이라고 부르는 구라이스라는 현장에 도착한 영후에게 이틀동안 그가 한 말은 이 두마디였다.
    그야말로 영후는 호구에 온 것이었다.

    영후가 중동으로 오기 석달 전.
    청담동 한소장의 집에서는 초저녁부터 싸우는 소리로 온동네가 떠나갈 듯 했다.
    근처에서 볼일을 보다가 오랫만에 들렀다 갈려고 찾아간 영후는 현관문을 열다가 뜻밖의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야, 내가 이꼴을 볼려고 니 뒷바라지하며 산 줄 아나? 어데 가시나가 없어서 사무실 경리가시나하고 붙어묵나? 그래 잘낫다 이자식아 이혼하자 이혼해!"
    들리는 내용으로 보아서 한소장이 사무실 경리아가씨와 바람피우다가 누나에게 걸린 것이 틀림없다. 한소장의 여자편력은 전에도 간간이 있어 온 일이기에 영후는 바로 상황을 알아챘다.

    그런데 이번은 한소장의 태도가 조금 달랐다.
    예전에는 끽소리하지 못하고 누나에게 죽을 시늉을하며 다시는 안그런다며 싹싹빌던 사람이 지금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이혼하자며 도리어 누나를 몰아세우며 큰소리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회집사라는 사람이? 주일이면 성경과 찬송가책을 옆에 끼고 세상에 둘도 없이 선량한 표정으로 교회를 가던 사람이?'
    순간 영후의 가슴에 분노가 일었다.
    일단 싸움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영후는 한소장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심으로 하여 평생 후회할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 자형! 나좀 봅시다."
    영후가 한소장을 부르자 흥분한 한소장이 "어? 니도 왔냐? 그래 나한테 무슨 할 말 있나? 니도 니누나처럼 따질려면 따져봐라"하며 누나에게 못다한 분풀이를 영후에게 한마디 쏟았다.
    그 말 한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영후의 주먹이 한소장의 턱을 갈겼다.
    "억"하고 얼굴을 감싸쥐는 한소장의 가슴팍에 영후의 앞차기가 꽂혔다.
    "방귀 뀐놈이 성낸다더니 이게 무슨 짓이요. 한 두번도 아니고" 바닥에 쿠당탕 쓰러진 한소장을 보고 한마디 내뱉고 영후는 돌아와 버렸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태에 놀라서 쳐다보던 누나의 놀란 표정을 뒤로하고 그 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엄마가 누나에게 간다며 영후에게 같이 가자고해서 청담동에 들린 날 누나는 영후에게 "니는 그렇게 세게 패면 우짜노? 한서방 가슴팍에 멍이 시퍼렇게 들었더라 사람 칠라고 운동했나?"하며 영후를 힐난하자
    엄마가 덩달아 "한서방이 영후한테 맞았나? 아이구 이자슥아,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데 니가 와 끼어 들어서 그 난리고?"
    영후는 불난 집에 부채질한 꼴이 된 것이었다.

    그러고 서너 달 지난 어느날
    한서방이 영후에게 미소띤 얼굴로 사근거리며 꼬셨다.
    "니 나따라서 중동 내 현장에 돈벌러 안갈래?"

    병풍만드는 목공소를 하다 운영이 잘 안되어서 두어달 전에 문닫고 딱히 하고 있는 일도 없던 참이라 아직 총각일 때 중동에서 돈벌어 오는 것도 괜찮은 일일 것같아 영후는 선뜻 동의했다.
    원래 뒤끝없는 성격에다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영후는 한소장의 비열한 계획을 알 턱이 없었다.



    - 계속
    2008,6,9福如海




    2.

    현장은 불가마속이었다.

    그늘하나 없는 모래벌판에서 고속도로 베이스코스작업을 하는 현장상황은 지옥훈련의 현장이었다.
    영후는 불도저 옆 손바닥만한 그늘에 앉아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담배한개피를 빼어물었다.
    "할만해? 여기는 머하러 와서 고생이야"
    오전내내 영후와 같이 철근조립작업을 하던 하반장이 영후곁으로 와 앉으며
    담배연기를 후 뱉어내며 영후를 보며 물었다.
    인천에서 카바레를 휩쓸고 다니던 춤도사였다는 하반장.

    나이들어 모아논 돈도 없어 중동에서 3,4년만 벌어 마음 잡고 살려고 왔다는 하반장이 영후의 유일한 말벗이었다.
    "불알 두쪽 밖에 없는 놈이 뭐든 못하겠수 죽기아니면 살기지요"
    영후의 대답에 "몸 조심해야 돼, 여기서는 아픈게 젤 서럽고 힘들어" 하반장이 담배연기를 길게 뱉어내며 모래밭에 가래침을 테엑 뱉었다.
    특별한 기술이나 보직도 없이 자형의 권유에 무작정 따라 와서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는 영후는 하반장의 충고를 가슴에 깊히 담았다.

    모래벌판에는 바람이 또 하나의 힘든 복병이었다.
    귓가를 때리며 끝없이 윙윙대는 모래바람이 때로는 시원하기도 하고 사막의 정취를 느끼게도 해주지만 그런 낭만은 잠시의 감상일 뿐 지평선 끝에서 시커먼 바람먼지가 보이면 잠시 후 사막벌판에 모래바람이 태풍처럼 휩쓸고 지나간다.
    '할라스'라는 이 모래태풍이 한번 지나가면 현장의 캠프는 쑥대밭이 되어 바람에 날아간 식당의 양철지붕 쪼가리들이며 자재들을 찾으러 영후와 현장인부들은 스리쿼터를 타고 사막을 헤메곤 했다.
    밤에는 꼬리를 치켜든 전갈들이 줄지어 기어다니고 손바닥만한 독거미들이 바닥을 휘젓고 다니는 곳. 그야말로 지옥훈련장으로는 최상급이었다.
    그러나 정작 영후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그런 것보다 현장의 열악한 경제상황이었다.
    한달 여 지나 어느정도 현장생활에 익숙해 진 영후가 파악한 현장상황은 하청을 받은 사장이 공사중도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있었으며 한소장이 그나마 기술자들을 관리하며 하청받은 공사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술자들과 인부들의 임금은 이미 열달째나 동결되어 있는 상태였다.
    영후는 한소장에게 현장상황을 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데리고 왔느냐며 한바탕 따져 물었지만 한소장은 "니가 신경 쓸 일 아니다. 가서 일이나 해라"며 냉랭한 대답만 할 뿐이었다.
    이 뜨거운 사막에 와서 고생하기는 한소장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영후는 좋은쪽으로 마음을 누그려트렸다.

    그러던 어느날 현장 인부들과 식당 주방장사이에 시비가 생겼다.
    사건의 발단은 주방장의 불만이 터진 것인데 '열달 째 월급 한푼 못받고 200명이나 되는 현장인원들 삼시 세끼를 다 해대는 건 자기가 생각해도 못할 일이니 식사는 각자 주방에서 해 먹으라, 나는 파업할테니 알아서 해라' 하고는 나자빠진 것이었다.
    오전내내 현장에서 폭염에 지쳐있다 점심식사를 하러 돌아온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하반장이 주방장의 멱살을 틀어지곤 "야 이자식아 우리 모두 다 죽으라는 말이냐? 빨리 밥해!"하며 욱박질렀다.

    한소장이 달려와 영후가 주방장의 일을 도우는 보조로 일하는 것으로 일단 수습했다.
    펄펄 끓는 폭염아래 현장보다는 주방일이 훨씬 편해 보이는 영후로서는 나쁠 것이 없어 보였다.
    영후가 주방에서 근무하던 어느날 주방장이 슬며시 영후를 불러 은밀한 지시를 했다.
    "내일 물차가 오면 주방 냉동창고에 있는 등심스테이크 5박스하고 양고기 한박스 실어보내라. 절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된다".
    주방장의 지시에 영후는 얼떨결에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 다음날 물차가 왔을 때 냉동창고에 있는 등심과 양고기를 운전석 뒤쪽에 실어 보냈다.

    그날 밤 현장캠프에 붉은 불을 번쩍이는 경광등을 단 사우디아라비아 경찰차와 감독관의 짚차가 현장에 들이닥쳤다.
    막 취침하려던 한소장과 스탶들이 허겁지겁 뛰쳐나와 감독관과 대면한 자리에서,
    리야드로 가던 물차에서 이쪽 현장에서 훔친 것으로 보이는 등심과 양고기 박스가 검문에 걸려 확인하러 왔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영후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현장 인원들의 식량으로 원청회사에서 지급한 식품을 빼돌린 것은 엄청남 범죄행위란 것을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되다니!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중동에서는 도둑질하다가 발각이 되면 손목을 자르는 처벌을 한다는데 영후는 눈앞이 캄캄해 졌다.
    물차를 운전하던 기사는 중동말이 통하지 않아 그저 "헬프미! 아이엠 헝가리, 아이엠 헝가리"란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고 통역이 필요했던 경찰은 감독관에게 연락을 취한 후 현장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아, 그건 리야드에 있는 한국근로자들 수십명이 식량부족으로 굶고 있다기에 인도적 차원에서 갖다주라고 내가 지시한 일이었소" 한소장이 기민하게 상황을 수습해 나갔다.
    "리얼리?"
    "예썰, 리얼리!"
    감독관과 사우디경찰차가 현장소장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철수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



    - 계속
    2008,6,10福如海



    3.

    주방사건의 벌칙으로 주방장과 영후에게 사역거리가 주어졌다.
    현장에 몇달 간 쌓여 있어 통행에 지장을 주고 있는 철근더미를 주방장과 둘이서 일주일내 모두 길 한쪽으로 옮기라는 지시였다.
    워낙 엄청난 양인데가 철근가닥들이 이리저리 엉켜 있어 아무도 옮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골치덩이를 주방장과 둘이서 일주일내에 옮기라는 것이다.

    영후에게 못할 짓을 시킨 주방장은 영후에게 미안해서 어쩔줄 몰라 한다.
    "자네에게 미안혀, 몇푼 챙겨서 돈 한푼 못 보내준 마누라 생일상 차려 멕일려고 했드만..."
    철근 한가닥을 애써 뽑아내며 주방장이 젖은 목소리로 푸념처럼 영후에게 말했다.
    영후는 고국에 처자식을 두고 돈벌려고 이 열사의 현장에서 땀흘리며 일하러 온 사람들이 딱해서 가슴이 아프다.
    아직 총각인 영후로서는 고국의 식구들에게 갖는 부담이 없으므로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뙤약볕아래서 한가닥씩 엉킨 철근을 뽑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작업이 할 일이 아니었다.
    한 삼십여분 둘이서 긍끙대며 간신히 철근 십여가닥 뽑아 옮겨 놓고 영후는 모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나운 모래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윙윙거리며 달려들었다.
    "헹님, 잠시 숨 좀 돌리고 합시다"
    " 에이, 시발 내가 이 짓 하려고 왔나. 이게 먼 생고생인지..."
    주방장이 영후옆에 털퍼덕 주저 앉으며 신세한탄을 한다.
    "옛날 잘 나갈 때 내가 유명호텔 조리장할 때는 정말 호시절이었는데...시팔"
    담배한개피에 불을 붙히며 주방장의 눈가에 물기가 어린다.

    "저 걸 어떻게 해치운다?"
    영후의 머리속이 빠르게 회전한다.
    아무래도 둘이서 이렇게 한가닥씩 엉킨 철근을 뽑아 내다가는 한달이 걸려도 다 못할게 분명하다.
    "철근이 쌓인 모래바닥을 파서 와이어로 묶어서 들면?"
    영후는 삽을 가지고 와서 철근이 쌓인 바닥을 파보다가 이내 삽을 모래바닥에 내던지며 "이게 장난이 아니네. 모래바닥이라 우습게 봤는데" 하며 주방장을 쳐다 보았다.
    워낙에 쌓여있는 철근더미가 커서 바닥을 팔려면 이쪽에서 저쪽까지 대충 2미터정도는 아래로 파야 하는데 아무리 모래바닥이라곤 하지만 철근더미아래로 터널을 파야 할 정도의 일이라 쉽사리 될 일이 아니었다.
    주방장옆에 다시 털썩 주저앉으며 "에이 시팔"하며 영후가 푹 한숨을 내 쉬었다.

    "별 수 없어, 그냥 한가닥씩 뽑아서 옮기는 수 밖에. 머리 쓰지마, 골아퍼" 주방장이 영후의 어깨를 툭 치며 모래를 툴툴털며 일어섰다.
    순간 영후의 머리속에 반짝하고 묘안이 떠올랐다.
    "아, 헹님, 잠깐만..."
    영후는 현장에 대기중인 페이로더를 몰고 와서 철근더미 한쪽 모서리 앞을 쿡 찍어서 철근 모서리를 들어 올린 후 와이어를 철근더미 아래로 집어넣었다.
    "됐어! 이 것 좀 봐요 안 파도 되잖아!"
    그리고 다른 쪽으로 페이로더를 몰고 가서 다시 똑 같은 방법으로 철근 모서리 아래쪽을 쿡 찍어 들어올리니 철근이 휘어지면서 와이어를 깔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양쪽에 와이어를 집어 넣고 난 후 들기좋게 단단히 묶은 와이어를 다시 와이어끼리 한번 더 잡아 묶고는 영후는 페이로더 앞 스푼으로 와이어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철근더미가 페이로다의 괴력에 통째로 들어 올려지는 순간 주방장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둘이서 한달이 걸려도 못할 일을 단 5분만에 해치우는 영후를 보고 주방장이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맡겨진 사역을 잠깐 사이에 해치우고 숙소로 돌아오는 영후와 주방장을 보고 한소장이 "왜 일 안하고 땡땡이 치고 오느냐"며 다그치자 주방장이 "아, 벌써 다 해치우고 왔으니 잠이나 한숨 잘랍니다"하고는 주방에 딸린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저친구가 더위 먹었나? 좌우지간 일주일내 다 해놔!
    안 그러면 한달월급 깔테니까" 찬바람이 쌩 지나가는 표정으로 한마디 하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다음날 현장에서 작업에 걸리적 거리던 철근더미들이 길 한편으로 얌전히 옮겨져 있는 걸 본 한소장이 어이없는 얼굴로 영후에게 물었다.
    "진짜로 둘이서 저걸 다 옮겼냐?"
    "그러면 누가 옮겼겠수, 둘이서 다 옮겼지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한소장이 영후를 쳐다 보았다.


    - 계속
    2008,6,10福如海



    4.

    사막은 아름답다.
    아니 아름답다는 표현보다는 신비롭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스리쿼터를 타고 몇시간을 달려도 보이는 것은 지평선 뿐
    끝없는 모래바다, 그곳이 사막이었다.
    그 사막의 한가운데 영후가 온 것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모두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숙소로 돌아간 저녁무렵에 영후가 속해 있는 숙소에서 생일 축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사람이 한 컨테이너에 네개의 침대를 놓고 사용하는 숙소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아빠 생일 축하 합니다~"
    장씨는 한국에서 가족이 보내온 카세트테잎을 눈물을 글썽이며 연신 되풀이해서 듣고 있었다.
    "저사람 일년이 넘도록 집에 돈한푼 못보내고 귀국할 수도 없고 딱해서 못보겠어..." 하반장이 영후에게 들리게 혼자말을 하며 벽쪽으로 돌아누웠다.
    아직 총각인 영후가 보기에도 마흔이 넘은 장씨가 딱해보여 가슴이 찡해진다.

    일하는 만큼의 임금이 체불되어 현금을 만지지 못하는 근로자들의 불만이 날이 갈수록 쌓여가던 어느날
    하반장을 주축으로 한 근로자들이 총파업을 선포하고 숙소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동안 밀린 돈을 주고 일을 시키던지 아니면 각자 살길 찾아 가게 내버려 두던지 해야 할 것 아니요. 대책을 세워 주쇼"
    한소장과 관리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반장은 근로자 대표로 강경하게 주장했다.

    "지금 사장이 구속되어 있고 원청회사가 공사 계약기간 동안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으니 도리 없는 건 다들 잘 알지 않소, 우리가 베이스코스 한구간을 완공하면 저쪽에서도 최소한의 임금을 지급하겠다고 했으니 참고 견딥시다"
    한소장이 난색을 표하며 하반장을 진정시키려 하자 하반장이 굳어진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이미 일부 공사대금을 지불한 걸 사장이 횡령해서 구속되어 있는데 그쪽에서 미쳤다고 또 돈을 주겠소? 이제 우리도 더이상 눈치보지 말고 우리 살길을 찾아 갑시다"
    대책없는 토론이 한시간정도 이어지다가 모두들 점심시간이어서 해산하고 다시 의논하기로 하였는데 감독관이 이 사실을 알고 저녁식사시간 전에 하반장을 감독관사무실로 호출했다.

    저녁식사 후 모두들 하반장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식당에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는 중에 이윽고 하반장과 한소장이 물먹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개자식들이 우리가 일 안나가면 내일 아침부터 강제로 현장에 투입하도록 하겠다네, 일 안하면 식량지원도 최소한도로 줄이겠다누만"
    하반장의 말에 모두들 분개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별 도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내 풀들이 죽어 숙소로 해산했다.

    원청회사가 풀어주지 않으면 모두들 꼼짝없이 노예살이를 해야하는 상황.
    그것은 한소장도 마찬가지였다.
    계약을 어기고 파업을 한다면 그들은 모두의 여권을 잡아두고 한사람도 귀국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동 어디에서도 불법 근로자로서 취업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원청회사가 근로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음날 아침 아침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대기중인데 요란한 스리쿼터의 엔진음이 근로자들의 숙소에 울려왔다.
    하반장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개새끼들..."하면서 장씨와 영후에게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작업복을 걸쳐 입었다.
    숙소밖에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아랍군인들이 근로자들을 현장으로 호송하기 위해 십여대의 스리쿼터를 몰고 와서 부릉부릉 엔진음을 내고 있었다.
    스리쿼터뒤 화물칸에 영후와 근로자들이 짐짝처럼 태워져서 사막 한가운데 있는 현장으로 모래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달려갔다.
    짐짝 처럼 실려가면서 영후는 지평선에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이 그렇게 크고 아름다운지를 그날 처음 알았다.

    그날부터 작업이 군인들의 지시에 의해 할당되어졌다.
    한소장은 현장과 근로자에 대해 감독관의 지시를 전달하는 일외에는 달리 권한이 없어졌다.
    날이 갈수록 현장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영후는 전문적인 기술이나 보직이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잡역부신세가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날 한소장이 영후를 불렀다
    "오늘 현장에서 감독관이 콘크리트몰탈 몰드를 수거해 간거 바꿔치기 해야하니 고대리한테 가서 도와줘라"
    고대리는 라보레이터 즉 시험실기사로 현장에 타설한 콘크리트의 강도를 기준에 맞게 하기 위해 콘크리트 재료배합을 하는 것이 맡은 일이었다.
    그러나 자재비를 절감하려고 한소장이 기한이 지난 바람든 시멘트를 폐기처리하지 않고 감독관 몰래 계속 사용하며 재료배합비율을 조작한 탓에 감독관이 강도 테스트를 위해 콘크리트 타설현장에서 수거해 가서 물에 담그놓은 감독관실의 몰드를 24일내에 바꿔치지 않으면 대형사건이 터질 판국인 것이었다.



    - 계속
    2008,6,11福如海



    5.

    끝없는 사막을 달리다 보면 대형송유관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세계 최대의 산유국.
    도둑질을 하다가 발각되면 가차없이 손목을 댕강 자르는 나라.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함무라비 법전을 모든 법령의 기본으로 삼고 시행하는 사우디 아라비아.
    이 곳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잡역부의 신세가 되어 있는 영후에게 하달된
    007작전을 능가하는 감독관실의 콘크리트몰드를 바꿔치기하라는 특명!
    그러나 고대리는 한두번이 아닌 경험담을 얘기하며 너무 겁먹지 말라고 영후를 위로했다.
    "별거 아냐, 오늘 저녁에 감독관 퇴근 후에 숙직하는 조수를 불러내 맥주한잔 멕일테니까 그때 바꿔놓고 나오면 돼, 내가 보조 열쇠 만들어 둔게 있으니까 흐흐흐"
    이미 한소장과 한통속이 되어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는 고대리가 영후의 어개를 툭치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고대리는 영후와 시멘트 모래 자갈을 일정비율로 배합한 몰드를 두개 만들어 놓고 저녁 식사후에 짚차로 오라고 하며 한소장 사무실로 건너갔다.

    저녁식사후 예정대로 고대리의 짚차로 가니 이미 새로 만든 몰드를 싣고 시동을 걸어 놓고 있었다.
    "렛츠 고!" 고대리는 작전을 수행하는 첩보원처럼 익숙한 몸짓으로 감독관 사무실로 차를 몰았다.
    "어이, 하삼! 뭐하나, 맥주한잔 하러 가자" 잠시후 평소에 친숙하게 꼬셔놓은 감독관 보조원을 짚에 태우고 고대리가 사라졌다.
    "걸리면 손목이 잘린다" 영후는 긴장감에 몸이 벌벌 떨리는 걸 느끼며 고대리에게서 받은 보조키로 감독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벌벌벌 떨리는 손으로 한쪽 구석 물통에 담그져 있는 콘크리트 몰드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가져간 몰드로 바꿔 놓고 밖으로 나온 영후의 눈에 쏟아질 듯 총총한 별들이 수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다음날 고대리가 눈을 찡긋하며 100리얄을 영후의 주머니에 찔러 주고는 "수고했다"며 절대 함구할 것을 다짐했다.
    이제 영후도 공범이 된 것이었다.
    그늘한점 없는 폭염속에서 부도난 현장의 뒷치닥거리를 하고 있는 근로자들이나 영후나 스트레스와 고된 일과로 인해 쇠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장에서 절단기에 손가락을 잘려 응급처치만 하고 붕대로 칭칭 동여매고 지내는 철근공 양씨를 비롯해서 비계공인 장씨마져 시름시름거리다 요즘은 드러누워 버린 것이었다.
    한낮의 뙤약볕아래서 긴 장화를 신고 콘크리트 타설현장에서 허리 펼 틈도 없이 레미컨에서 쏟아지는 콘크리트 몰탈을 철근 사이로 퍼나르던 영후가 허리를 펴는 순간 갑자기 앞이 핑글 돌며 휘청하며 쓰러진게 영후에게 시작된 비극의 시초였다.

    한 삼십여 분 정도 지난 후에 영후가 눈을 뜨니 페이로더 옆 그늘에 눕혀져 있었는데
    "너 졸도했어, 그러게 몸조심하면서 어영부영하라고 했잖아, 미련스럽게 악을 쓰면서 일을 하누 바보같이" 하반장이 걱정스런 얼굴로 영후를 내려보며 혀를 끌끌 찼다.
    현장에서 영후가 졸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소장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영후는 한소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거겠지..." 영후는 또 한번 좋게 생각하기로 하고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부상자와 몸져 눕는 근로자가 늘어나자 원청회사와 한소장간에 재협상이 시작되었다.
    사우디 아라비아 대한민국 대사관에서도 현장에서 발이 묶여 있는 한국근로자를 위한 대책마련을 위해 원청회사와 수차례 접촉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어차피 현장공사상황에 별다른 진척이 없자 원청회사에서 타결책을 강구키로 하여 벌어진 협상이었다.
    " 모두들 귀국과 재쥐업을 원하고 있으니 인도적인 차원에서 배려해 달라"
    한소장과 근로자 전부의 의견이 우선적으로 받아 들여지자 모두들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영후는 어떡할거야?" 하반장이 자기는 한소장을 따라 리야드에서 이삼년 더 일하다가 귀국할 거라면서 영후에게 물었다.
    한소장이 무슨 언질을 주리라 여기고 달리 계획이 없던 영후는 하반장에게 아직 모르겠다며 빙긋 웃었다.

    원청회사와 타결이 난 일주일 후 중동에 있는 여러 건설회사에서 현장근로자들을 픽업해 가기 시작했다.
    200여명의 근로자들이 불과 일 이주 사이에 삼분의 이가 빠져나갔다.
    텅빈 현장에서 한소장은 영후에게 가타부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리야드 현장에서 일을 벌릴 궁리만 하고 있었다.
    '경리부장하고 고대리, 그리고 하반장하고 비계공하고 스무명이면 충분해 음...영후 저녀석은 생고생 좀 더 시켜야 되고...'
    그동안 건설회사 선배를 통해 리야드에서 조그만 건축공사를 하청받기로 한 한소장은 새 사업궁리에 열중했다.



    -계속
    2008,6,11福如海



    6.

    현장에 남아있는 근로자들이 대충 빠져 나간 어느 날 영후에게 뜻밖의 제안이 왔다.
    '담만'에서 김치와 맥주를 수입해서 판매하고 있는 '정식품'이란 회사가 '리야드'에 지사를 설립하려고 하는데 창고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니 영후에게 와서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한소장과 리야드에서 일하기로 했던 경리부장이 '정식품'에 리야드지사장으로 스카웃되자 평소 형님동생하며 지내던 경리부장이 영후를 추천해 준 일이었다.
    월 1,500불에 보너스까지 조건이 좋았으므로 영후는 생각할 것도 없이 그자리에서 수락했다.
    그동안 가타부타 영후의 진로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던 한소장이 이 사실을 알고 영후에게 '너는 내게 상의도 없이 니 마음대로 결정하면 어쩌자는 거냐?'며 퉁명스럽게 쓴소리를 했다.
    근 십여개월을 지내는 동안 이웃집 개 닭보듯 영후를 대한 터라 영후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기회가 왔을 때 동물적 본능으로 선택하게 된 일이었다.

    정식품으로 경리부장과 같이 현장을 떠나는 날
    시커먼 모래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소장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간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영후는 소지품 몇가지와 옷 몇벌을 담은 가방하나를 차에 싣고 현장을 출발했다.
    "한소장은 리야드에서 만나면 돼. 내가 주소 알아. 지긋지긋한 현장과 작별하니 속이 다 시원하다. "경리부장이 도요다픽업 엑셀레이타를 힘주어 밟으면서 차창 밖으로 테엑 침을 뱉었다.

    모래사막을 가로질러 두 시간이나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송유관을 따라 도착한 '리야드'의 '정식품'지사는 3층 빌라건물로 2층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3층은 숙소, 그리고 1층은 물품보관창고와 냉동창고용도로 갖춰져 있었는데 바로 이 창고관리가 영후가 맡아서 해야할 일이었다.

    현장에서 폭염과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다 환경이 바뀌자 그동안의 긴장도 확 풀렸다.
    군대생활할 때 보급대 창고관리를 했었던 영후에게 식품회사 창고관리는 일도 아니었으므로 중동에 와서 처음으로 영후는 편안한 심정으로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한소장이 이 근처에 빌라를 얻어서 일 시작했어, 같이 가보자" 며칠 후 경리부장과 같이 등심 스테이크 2박스를 차에 싣고 도착해 보니 현장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반가운 얼굴로 환영한다.

    "영후 자네가 젤 좋은 데로 뽑혀 갔다고 다들 부럽다고 난리여, 돈많이 벌어" 하반장이 잘됐다고 영후의 어깨를 툭치며 웃었다.
    한소장을 따라온 주방장도 영후의 손을 흔들며 "이제 식량걱정은 안해도 되겠어, 영후가 있으니까 말이여!"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날 저녁 가져온 스테이크와 알콜 도수없는 맥주로 리야드에서 다시 만난 동료들과 배불리 먹고 마시던 일은 타국에서 한 민족 한 동포라는게 얼마나 끈끈한 사이인지를 새삼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순풍에 돛단 듯 리야드 생활에 차츰 익숙해져 가던 어느날
    야적창고 설치작업을 하던 영후에게 사고가 생겼다.
    굵은 파이프를 가로 세로 잇대어 픽스작업하던 영후가 현기증을 느끼는 순간 정신을 잃고 졸도한 것이다.
    같이 작업을 하던 경리부장이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놀라 영후를 흔들어 보아도 대답이 없자 급히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책상서랍에서 침구통을 꺼내 든 경리부장이 영후의 팔목 급소에 침을 찌르기 시작했다.
    양쪽 팔 급소에 침을 찔러 놓고 삼십여분이 지나자 거짓말 처럼 영후의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제 정신이 드나? 내가 보여?"
    경리부장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영후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아, 형님 내가 졸도 했었어요?"
    "내가 맥을 짚어보니 심장이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보여. 아무래도 안되겠어, 귀국해서 치료해야할 것 같아" 영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경리부장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숙소로 돌아와 일단 안정을 취하자 어지러운 증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왜 이럴까? 현장에서 고생하다가 긴장이 풀려서 그런건가?'
    현장에서 한번 쓰러진 후로 두번째 졸도한 것이다.
    아무래도 몸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
    그날 이후로 영후는 힘든 야외작업을 할 엄두가 나지 않고 몸에 자꾸 신경이 쓰여 수척해 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일단 사직하고 몸부터 고치고 다시 와 그 몸으로는 일 더 못한다. 욕심부리다가 죽는다" 경리부장이 영후를 채근했다.
    경리부장이 한소장에게 전화로 한참 통화 후
    "한소장이 빌라로 데려 오라고 하니 가자"면서 영후를 차에 태웠다.
    '정식품'으로 온지 불과 두달만에 영후에게 먹구름이 닥친 것이었다.
    "리야드에 있는 조그만 병원에서 검사할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귀국해서 정밀 검사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소" 경리부장은 한소장에게 영후를 인계하고 돌아갔다.
    영후가 귀국하지 않겠다며 고집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소장이 뜻밖의 말을 했다.
    "니 여권을 원청회사에서 잃어 버려서 찾지를 못한단다. 여권 찾는대로 연락해 준다고 했다" 원청회사와 계약해지 후 근로자들의 여권을 보관하고 있는 한소장이 영후의 여권을 원청회사가 잃어버렸다고 둘러대자 한소장의 속셈을 전혀 알 수 없는 영후는 앞이 깜깜해졌다. 여권이 없으면 출국 비자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 계속
    2008,6,12福如海



    7.

    여권을 찾을 때 까지 꼼짝 할 수 없게 된 영후로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한소장이 원청회사와 연락을 취하는 유일한 통로였으므로 매일 한소장으로 부터 소식만 기다리는 처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하루 이틀 지나 갈수록 수척해져 가는 영후를 보고 하반장과 근로자들이 모두 자기 일처럼 걱정들을 하곤 했다.
    저녁식사 시간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다가 영후는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아 숟가락을 놓고 바깥으로 나왔다.
    요즘들어 몇숟갈 먹지 않아도 목에 걸려 넘어가지를 않아 제대로 먹을수가 없다.

    저녁바람이나 쐴 요량으로 대문밖으로 나서니 온 도시가 에어콘소리로 웅웅거린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몇걸음 걷지를 못하고 영후는 도로 빌라로 들어왔다.
    3층 빌라의 2층 숙소로 올라가는 것도 힘에 부친다.

    심장이 뛰는지 안뛰는지 금방 멈출 것 같이 기운이 없어 영후는 계단에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다가 불현듯 한번도 올라가 본 적이 없었던 3층으로 가보고 싶은 생각에 한걸음씩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의 끝에 커다란 방이 하나 있었으므로 영후는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았는데 캄캄한 방이 어둠속에서도 제법 널찍하게 보였고 잠시 후 어둠에 눈이 익자 군인들 내무반처럼 양쪽으로 침상이 보였고 그위에 매트레스더미가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근로자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방이구나'
    열 댓명정도가 취침할 수 있도록 내무반처럼 꾸며서 사용하던 방이란 걸 영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 침상 한쪽에 잠시 걸터 앉아 예전에 이 방에서 생활하던 근로자들의 광경을 그려보는데 그순간 한쪽 벽에 무언가 걸려 있는 것이 영후의 눈에 띄었다.
    벽걸이 에어컨을 사용하다가 떼어내고는 합판으로 막아놓은 한쪽 벽의 틈새로 들어오는 한줄기 어슴프레한 빛줄기로 인해 맞은 편 벽에 걸려있는 물체의 모습이 십자가라는 걸 영후는 알수 있었는데 기독교를 금지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로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위해 십자가를 걸어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어두컴컴한 방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와 언제 돌아갈지 알 수 없어 하루하루가 지옥같은 삶을 살고 있는 한 청년의 만남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중동에 오기 전 영후는 성경의 창세기부터의 오류와 모순에 성경을 내던지고 십자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독선적인 종교에 대해 넌더리가 나서 냉담하고 있던 가톨릭 모태신자였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 한쪽 벽에 걸린 십자가를 보면서 영후는 '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찬미를 받아야 할 십자가가 이 어둡고 먼지 쌓인 방에 홀로 걸려 있는가 그 모습이 나보다 더 가련하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죽는다면?'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그동안 옳바르게 살아오지 못한 자신의 죄로 인해 갑자기 앞이 깜깜해져서 도저히 죽을수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어서 영후는 두눈을 감았다.
    '하느님! 저를 여기서 살려 주신다면,
    오직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 한가지만이라도 하고 죽을 수 있게 해 주신다면 다른 소원이 없겠습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한가지라도 좋은 일을 하고 죽을수 있다면 그래도 마음 편히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영후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약속했다.
    먼지와 거미줄을 털어내고 영후는 머큐롬으로 칠한 붉은 나무십자가를 침대머리맡에 걸어놓고 오직 한가지 약속의 기도를 눈물을 흘리며 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십오일 후, 한국에서 공휴일로 제정된 개천절날,
    오후에 일터에서 돌아온 한소장이 "여권을 찾았다는 통지가 왔다, 여권을 담당하던 요르단친구가 제나라에 갔다가 뒤늦게 니 여권을 갖고 왔다고 하더라'며 영후에게 소식을 전했다.
    "비자신청 해 뒀는데 금방 나올거다" 한소장이 사무적인 어투로 말하고는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10월3일 개천절, 영후에게 하늘이 열린 날이었다.

    일주일 후 한글날.
    비자를 받아 출국하는 영후를 태우고 리야드 공항에 나온 한소장이
    "가서 치료 잘해라" 하고는 돌아갔다.
    갈 때와 같이 열여덟시간의 장시간 비행 후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영후의 온몸에서 그동의 긴장감이 풀어지며 몸이 나른해졌다.

    "목사십니까?"
    007가방에 달랑 붉은 나무십자가 하나 들어있는 것을 본 세관검사원이 영후를 훑어보며 물었다.
    일년이나 중동에 갔다 돌아오는 사람의 소지품이 달랑 나무십자가 하나였으니 이상하게 여겨져서 물어본 것이다.
    "아니오 그냥 근로잡니다" 간단히 대답하고 영후는 출국장을 빠져 나왔다.
    한국을 떠난지 꼭 일년 만에 영후는 망신창이의 몸으로 한소장의 호구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것이었다.



    - 계속


    2008,6,13福如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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